이 작품은 지난 세기 포스터 문화를 향한 불손한 오마주이자 21세기 한국의 시각 환경에 관한 성찰이다. 여느 디자이너처럼 우리도 그래픽 디자인과 역사의 대부분을 책으로 배웠다. 그리고 그런 책에는 20세기 유럽과 미국의 ‘영웅’ 디자이너 포스터가 잔뜩 실려 있었다. 어떤 사례는 실제로 본 적이 없는데도 눈에 익은 나머지 기억에 의존해 대충 그려 낼 수 있을 정도다. 우리가 존경하는 영웅(치홀트, 게르스트너, 크라우얼, 판 토른)은 모두 위대한 포스터 디자이너였다.
그래서 슬프다. 우리가 그처럼 선구적이고 야심적이며 시의적절한 포스터를 만들 가능성은 없을 테니까. 세상 일반이 아니라면 적어도 시장에서는, 이제 포스터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포스터 대신 우리에게는 똑같은 물건을 팔아 보려 애쓰는 빌보드, 현수막, 전단, 스티커가 있다. 그러나 매체의 다양화가 다양한 시각을 낳지는 않았다.
어쩌면 ‘위대한 20세기 포스터 문화’ 자체가 환상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작품을 경외하도록 세뇌당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창작자에 관해, 또는 (대부분 백인 남성인) 그들이 그처럼 ‘우상’이 된 과정에 관해 충분히 비판적인 태도를 기르지 못한 탓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처럼 영웅을 숭배하는 (반)역사(무)의식이 현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을 흐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의 영웅들을 끔찍이도 무례하게 기려 볼까 한다. 한국 어디서나 마주치는 광고 전단에 우리가 숭배하는 이름들을 병치함으로써 그들에게 오늘날 현실의 단편을 들이대 보자는 생각이다. [예컨대 ‘큐 대리운전’ 광고 전단에 ‘헨드릭 베르크만 / 계산기 연극 포스터 / 네덜란드 1933’이라는 캡션이 붙는 식이다.] 본래 목적을 잃어버린 그들의 작품은 미술관과 도서관, 개인 컬렉션에 송장처럼 안치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유령은 여전히 우리를 홀린다. 어떤 면에서, 이 작업은 그들을 내쫓기 위한 부적인 셈이다.